🌹 로맨스 소설 19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제9화 — 열지 않은 상자

오후 두 시.나는 알베르또 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저 왔어요.”“벌써?”“두 시예요.”잠깐 조용했다.“아.”“잊었죠?”“아니.”“그럼요?”“샤워를 아직 안 했어.”나는 웃었다.“그게 잊은 거예요.”“십 분.”십오 분 뒤 문이 열렸다.오늘 알베르또는 흰 티셔츠 위에 짙은 초록색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머리는 아직 조금 젖어 있었다.“십 분이라면서요.”“옷 고르느라.”“상자 찾는데 옷도 골라야 해요?”“집에서도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지.”그건 알베르또다운 대답이었다.상자는 생각보다 많았다.책.겨울옷.오래된 접시.사진.세 번째 상자를 뒤지다가 알베르또가 사진 한 장을 들었다.“이거 봐.”“지금 사진 볼 때 아니에요.”“나 스무 살 때야.”나는 슬쩍 봤다.“잘생겼네요.”알베르또가 바로 물었다.“지금은?”나는 ..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 제8화 — 처음 난 음식 냄새

다음 날,알베르또는 약속보다 삼십 분 늦게 왔다.“어디예요?”전화기 너머로 대답이 들렸다.“가고 있어.”“어디쯤인데요?”잠깐 조용했다.“집.”“집에서 가고 있다고 해요?”“마음은 이미 출발했어.”나는 웃음을 참으며 전화를 끊었다.알베르또는 어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크림색 니트 폴로에 짙은 바지, 갈색 로퍼.나는 그를 위아래로 봤다.“왜?”“청소하러 오는 사람 옷 같지는 않아서요.”그가 자기 신발을 내려다봤다.“이거 좋아하는 건데.”“오늘 싫어질 거예요.”낮에 다시 본 트레일러는 더 낡아 보였다.기름때 낀 서비스 창.갈라진 실리콘.낡은 싱크와 선반.나는 메모장에 적었다.싱크. 전기. 냉장고. 페인트.알베르또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아래는 빨간색으로 하자.”“지금 물도 제대로 안 나와요.”“위..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 제7화 — 계약금은 누가 냈는데

다음 날 오후 두 시.트레일러 주인은 오지 않았다.두 시 십 분.안 왔다.두 시 이십오 분.여전히 안 왔다.나는 트레일러 앞에서 햇빛을 피해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전화해 볼까요?”알베르또가 휴대폰을 꺼냈다.“조금 더 기다려봐요.”“난 기다리는 거 잘 못하는데.”“알 것 같아요.”“어떻게?”“그냥요.”알베르또가 나를 쳐다봤다.“요즘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나는 웃었다.“아직 별로 알고 싶지는 않은데요.”“상처네.”말은 그렇게 하면서 웃고 있었다.두 시 삼십 분.낡은 회색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트레일러 주인이 내렸다.“Sorry, sorry.”그는 열쇠 꾸러미를 흔들었다.“은행 갔다 오느라.”알베르또가 나를 봤다.“자, 사장님 오셨습니다.”“제가 왜 사장님이에요?”“곧 될 수도 있으니까..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 제6화 — 이름을 기억하는 법

다음 날 아침,나는 트레일러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어젯밤에도 한참 생각했지만아직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그래서 빵을 만들었다.생각이 많을 때는반죽이 제일 좋다.밀가루는 말을 걸지 않고,버터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그리고 적어도 레시피대로 하면대부분 예상한 결과가 나온다.사람하고는 다르다.오전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때문이 열렸다.딸랑.알베르또였다.“좋은 아침.”“좋은 아침이에요.”그는 카운터에 오더니한참 나를 보았다.“왜요?”“뭔가 다른데.”나는 내 옷을 내려다봤다.“뭐가요?”“머리?”“어제도 이 머리였어요.”“안경?”“원래 쓰는데요.”“그럼…”그가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나는 기다려주었다.한참 뒤 그가 말했다.“립스틱?”“안 발랐어요.”“아.”나는 웃었다.“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죠..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 제5화 — 문을 열어본 것뿐인데

“가서 볼래요?”알베르또가 말했다.나는 창밖을 보았다.길 건너편에 세워진 낡은 푸드트레일러.앞유리에는 여전히FOR SALE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싫어요.”“왜요?”“관심 없으니까.”“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던데.”나는 그를 쳐다봤다.“제가요?”“네.”“언제요?”“파스타 세 번 먹는 동안.”“….”이 남자는 쓸데없는 걸 잘 본다.결국 나는 앞치마를 벗었다.“보기만 하는 거예요.”“물론이죠.”“사는 거 아니에요.”“누가 사래요?”“그리고 5분만.”알베르또가 웃었다.“벌써 규칙이 세 개네요.”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게 문을 열었다.딸랑—이상했다.매일 열고 닫는 문인데,그날은 왠지다른 곳으로 나가는 문 같았다.가까이에서 본 트레일러는생각보다 더 낡아 있었다.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졌고바퀴에는 먼지가 잔뜩 ..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 제4화 — 두 사람분은 아닌데

다음 날 아침.나는 평소보다 일찍 가게에 나왔다.이유는 없었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밀가루를 꺼내고,이스트를 재고,물을 받았다.그리고 반죽을 시작했다.한참 치대다가 손을 멈췄다.포카치아였다.“미쳤나 봐.”어제 분명히 말했다.안 만들 거예요.그런데 지금 내 손에는올리브오일을 잔뜩 머금은 포카치아 반죽이 들려 있었다.나는 혼잣말을 했다.“내가 먹으려고 만드는 거야.”그 말은 꽤 그럴듯했다.그래서 두 판을 만들었다.오전 열한 시 십 분.문이 열렸다.딸랑.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누군지 알 것 같았으니까.“좋은 아침.”역시 그였다.알베르또.“늦었네요.”말이 먼저 나왔다.그가 잠깐 멈췄다.“기다렸어요?”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아뇨.”“그런데 왜 늦었다고 해요?”“…그냥요.”그가 웃었다.그 웃음이 마음..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 제3화 — 포카치아는 없어요

다음 날 오후 세 시 십 분.베이커리 문이 열렸다.딸랑.보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오후 세 시쯤이면 손님이 뜸해졌다.아침부터 이어진 바쁜 시간이 끝나고, 진열대에는 팔리지 않은 빵 몇 개와 쿠키, 크루아상 두 개가 남아 있었다.보영은 작업대에서 밀가루 봉지를 정리하고 있었다.“포카치아 있어요?”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보영의 손이 멈췄다.고개를 들었다.알베르또였다.어제와 같은 갈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물론 실내에서.보영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없어요.”알베르또의 표정이 굳었다.“없어요?”“네.”“어제는 오늘 만든다고 했잖아요.”“제가 언제요?”“또 만들면 된다고 했잖아요.”“그게 오늘 만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요.”알베르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보영은 다시 밀가루 봉지를 정리했다.“내가 일부..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 제2화 — 마지막 포카치아

알베르또는 그 여자를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이름도 몰랐다.전화번호는 물론이고 어디 사는지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아는 것이라고는 딱 세 가지였다.자기가 고른 선글라스가 별로라고 했다는 것.자기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그리고 자기가 산 갈색 선글라스는 그녀가 골라줬다는 것.그런데 이상하게도 알베르또는 그날 이후 그 선글라스를 자주 썼다.물론 그녀 때문은 아니었다.적어도 알베르또는 그렇게 생각했다.며칠 뒤 오후.알베르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카펫 청소회사는 그럭저럭 잘 돌아가고 있었다.직원들도 있었고, 이제는 알베르또가 모든 현장에 직접 나갈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그는 가끔 현장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몸을 ..

《사랑은 레시피에 없었다》제1화 — 선글라스를 고르다가

보영은 선글라스를 사러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정확히 말하면, 살 생각은 없었다.미국에 온 뒤 보영에게는 사고 싶은 것보다 사야 할 것이 훨씬 많았다. 휴대전화 요금, 자동차 보험, 어머니의 약값, 장을 볼 때마다 조금씩 올라 있는 식료품 가격까지.선글라스는 그 목록에서 꽤 아래쪽이었다.그런데 햇빛이 문제였다.한국에서 보던 햇빛과 이곳의 햇빛은 뭔가 달랐다.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아름다웠지만, 오후가 되면 햇빛이 눈을 정면으로 찔렀다.결국 보영은 쇼핑몰을 걷다가 안경점 앞에서 멈췄다.“보기만 하자.”요즘 보영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었다.보기만 하자.가격만 보자.생각만 해보자.그리고 가능하면 사지 말자.보영은 진열대에 놓인 선글라스를 하나씩 살펴보았다.검은색은 너무 평범했고, 갈색은 조금 나이 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