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선글라스를 고르다가
보영은 선글라스를 사러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 생각은 없었다.
미국에 온 뒤 보영에게는 사고 싶은 것보다 사야 할 것이 훨씬 많았다. 휴대전화 요금, 자동차 보험, 어머니의 약값, 장을 볼 때마다 조금씩 올라 있는 식료품 가격까지.
선글라스는 그 목록에서 꽤 아래쪽이었다.
그런데 햇빛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보던 햇빛과 이곳의 햇빛은 뭔가 달랐다.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아름다웠지만, 오후가 되면 햇빛이 눈을 정면으로 찔렀다.
결국 보영은 쇼핑몰을 걷다가 안경점 앞에서 멈췄다.
“보기만 하자.”
요즘 보영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었다.
보기만 하자.
가격만 보자.
생각만 해보자.
그리고 가능하면 사지 말자.
보영은 진열대에 놓인 선글라스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검은색은 너무 평범했고, 갈색은 조금 나이 들어 보였다. 커다란 프레임은 얼굴의 반을 가렸다.
그녀는 작은 가격표를 뒤집어 보았다.
“미쳤네.”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때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안 어울려요.”
보영은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쉽게 눈에 띌 것 같은 남자였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손목에는 오래 차서 가죽이 부드럽게 닳은 시계가 있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실내에서.
보영은 남자의 얼굴보다 먼저 선글라스를 보았다.
‘실내인데.’
남자가 자기 선글라스를 조금 내려 눈을 보였다.
“아까 그거요.”
보영은 자신이 내려놓은 선글라스를 바라봤다.
“네?”
“안 어울린다고요.”
“아…….”
보영은 잠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많이 하나?
아니면 이 남자만 그런 건가?
“안 살 거였어요.”
남자가 웃었다.
“다행이네요.”
보영은 대답하지 않고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남자도 자기 선글라스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화는 끝난 줄 알았다.
보영은 다른 진열대로 갔다.
이번에는 검은색 프레임에 렌즈가 약간 둥근 선글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았다.
가볍고 단순했다.
보영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다른 손도 동시에 같은 선글라스를 잡았다.
보영이 손을 멈췄다.
남자도 멈췄다.
아까 그 남자였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먼저 손을 놓았다.
“Please.”
“괜찮아요. 먼저 보세요.”
“Ladies first.”
“정말 괜찮아요.”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먼저.”
‘그럴 거면 왜 Ladies first라고 한 거야?’
보영은 말하지 않았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집어 들고 기존에 쓰고 있던 것을 벗었다.
그리고 새 선글라스를 썼다.
거울을 보았다.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왼쪽으로도 돌렸다.
턱을 조금 들었다.
다시 정면.
보영은 처음에는 기다렸다.
조금 더 기다렸다.
남자는 아직도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냥 내가 다른 걸 볼까.’
그 순간 남자가 물었다.
“어때요?”
보영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자기에게 묻는 것이 맞았다.
“저요?”
“네.”
“제가 왜요?”
남자가 웃었다.
“여자 의견이 필요해서요.”
“직원한테 물어보세요.”
“직원은 팔아야 하잖아요.”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보영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보았다.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남자의 얼굴과 따로 놀았다.
선글라스가 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별로예요.”
남자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
“뭐가요?”
“선글라스요.”
남자는 거울을 보았다.
다시 보영을 보았다.
“정말?”
“네.”
“이게요?”
“네.”
“왜요?”
보영은 잠시 고민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설명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남자는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젊어 보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남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보영은 그제야 조금 미안해졌다.
“선글라스가요.”
“…….”
“선글라스가 너무 젊어 보인다는 뜻이에요.”
“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요?”
보영은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지?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보고 있잖아요.”
“선글라스를 보고 있었죠.”
이번에는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영은 다시 진열대를 보기 시작했다.
알베르또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보통은 반대였다.
먼저 말을 걸고, 웃고, 이름을 묻는 쪽은 여자였다.
적어도 알베르또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보다 선글라스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알베르또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럼 어떤 게 어울릴 것 같아요?”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예요?”
“여기 다른 사람이 있나요?”
보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직원도 있었고 손님도 세 명이나 있었다.
“많은데요.”
알베르또가 웃었다.
보영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미워하기는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진열대를 잠시 보다가 하나를 집었다.
진한 갈색 프레임이었다.
“이거요.”
알베르또가 받아 썼다.
거울을 보았다.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오.”
이번에는 정말 잘 어울렸다.
알베르또가 보영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괜찮네요.”
“괜찮다?”
“네.”
“그게 다예요?”
“선글라스인데 뭐가 더 있어야 해요?”
알베르또는 웃음을 터뜨렸다.
보영은 그사이에 자신이 봐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집었다.
가격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비쌌다.
다시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알베르또가 보았다.
“그거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안 써봤는데 어떻게 알아요?”
“감이죠.”
“저는 감을 별로 안 믿어요.”
“뭘 믿는데요?”
“확실한 거요.”
“세상에 확실한 게 있어요?”
보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아주 평범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
세상에 확실한 게 있느냐고?
보영은 알고 있었다.
없었다.
어제까지 있던 사람이 오늘 사라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도 그랬고,
오빠도 그랬고,
조카도 그랬다.
보영의 표정에서 아주 잠깐 웃음기가 사라졌다.
알베르또가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보영은 선글라스를 내려놓았다.
“그러네요.”
그녀가 말했다.
“없는 것 같네요.”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선글라스는 써보고 사야죠.”
알베르또도 따라 웃었다.
“그건 인정.”
보영은 다른 선글라스를 하나 써보았다.
알베르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가요?”
“그건 안 돼요.”
“왜요?”
“너무 무서워 보여요.”
보영은 거울을 보았다.
“괜찮은데요.”
“은행 털러 갈 것 같아요.”
보영이 처음으로 웃었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한 웃음이었다.
알베르또도 웃었다.
“드디어 웃었네요.”
그 말에 보영의 웃음이 바로 사라졌다.
“제가 언제 안 웃었다고요?”
“지금까지.”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요?”
알베르또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한 8분?”
“그것도 재고 있었어요?”
“아뇨. 감이에요.”
보영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감을 믿으면 안 돼.”
이번에는 둘 다 웃었다.
잠시 후 보영은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알베르또는 보영이 골라준 갈색 선글라스를 샀다.
계산을 마친 알베르또가 매장 밖으로 나왔을 때 보영은 이미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잠깐!”
보영이 돌아보았다.
알베르또가 새 선글라스를 쓰고 서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보영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선글라스 골라준 사람 이름 정도는 알아야죠.”
“영수증에 제 이름 적을 것도 아니잖아요.”
“다음에 만나면 뭐라고 불러요?”
보영이 웃었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요?”
그리고 돌아서 걸어갔다.
알베르또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혼잣말했다.
“이름도 안 알려주네.”
그런데 이상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알베르또는 새 선글라스를 한번 고쳐 썼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아직 몰랐다.
며칠 뒤,
이번에는 선글라스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포카치아 한 조각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